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허무, 미소, 의무

출처 : http://cocoaday.tistory.com 

 

 

허무, 미소, 의무

다시 돌아왔다.
허와 무, 네 긴 뼈가 따스히 출렁이고 있는 방으로.
너는 토대이다.
네 뼈 위에서 오늘은 분홍빛 살을 떨며 아젤리아가 피고 있구나.
난(蘭)도 필 준비를 하고 있구나.
구석에선 거미 한 마리가 검은 웃음을 던지며,
한 마리 파리의 피를 멈추게 하고 있구나.

너는 미소를 짓고 있다.
나는 네 깊디깊은 미소를 만진다.
죽음도 네 출렁이는 뼈 위에서는 하릴없이 웃고 있는 아침.
세계의 아침에 해가 떠오른다.
출렁이는 거대한 객관, 너를 향하여.
객관과 주관의 이 무수한 싸움들을 향하여.

물론 나는 나의 의무를 알고 있다.
네 생명줄의 원을 완성시켜 주어야 할 나의 의무를.
현재가 영원인 나의 의무를.
사소함으로 위대한 이 모든 것들의 숨길들 앞에서.

- 강은교의 <허무수첩> 中 -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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